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요동정벌 (문단 편집) == 그 이후의 요동 정벌 == 1차 요동 정벌이 시행된 다음해 5개월후인 1371년 3월, [[북원]]의 요양성(遼陽省) 평장사(平章事) 유익(劉益)과 우승(右丞) 왕카라부카(王哈刺不花) 등이 명나라에 귀부하려 했으나 명나라가 요양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까 우려한 나머지, 요양이 [[고구려|본시 고려땅이니]] 고려조정에서 명나라에 요청하면 이주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우리 조정에 사자를 보내 의사를 타진해 왔으나 고려는 무응답이였다. 공민왕은 [[정몽주]]를 명나라에 파견했는데 정몽주가 돌아간 후 [[홍무제]]는 "고려가 명나라에서 첩보 활동함. 정조사(正朝使)로 온 사신은 한 달이면 올 거리를 4개월에 걸쳐서 명나라를 활보한 후에 베이징에 도착했는데 이게 의심스러움.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길래 그놈을 손발 묶어 물속에 던져놓더니 살려달라며 한어(중국어)로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는데 그놈이 꼰지를 바로는 "올 때는 육로로 왔고 갈 때는 해로로 갈 겁니다"라고 했는데 이건 산동 일대를 정탐하기 위해서임."이라고 말을 하며 고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내비쳤다. 심지어는 "[[선빵|고려가 우릴 치게 만들자]], 그러면 우리가 배 8척 ~ 9척을 건조해서 고려를 3개월 만에 조질 수 있음"이라는 강경한 발언까지 했을 정도였다. 다만 [[공민왕]]은 이후 "동녕과 요양이 명나라에 귀화를 안 했으니 야만인이다.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방어해야한다"라며 결국 요동을 내어주고 그나마 있는 우리 땅을 잘 지키자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요동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게 된다. 이후 1371년([[홍무제|명태조]] 4년) 4월에 명나라는 북원에 있던 요양행성을 점령하고 요동 서남부에 정요위와 요동 도사를 설치했다. 이에 1371년 9월 문하찬성사 서경도만호 안우경(安遇慶)이 안주상만호 이순(李珣)과 오로산성[* 오녀산성.]을 다시 쳐서 10월에 함락시켜 왕카라부카를 생포하여 귀환한다. 본격적인 다음 요동 정벌은 고려 [[우왕]] 때 [[명나라]]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[[최영]]의 주도로 하려다가 이성계 지휘하의 [[공요군]]이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했는데,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'''[[위화도 회군]]'''이다. 그리고 조선 건국 후 [[이성계]]가 즉위하고 명나라와 표전문 문제로 갈등을 빚자, [[정도전]]의 주도 하에 [[제3차 요동정벌|제3차]]가 있을 뻔 했지만 [[제1차 왕자의 난]]으로 무산되었다.[* 1395년 [[주원장|명태조]]가 조선이 요동을 침략하려는 술수를 부린다며, 조선 정벌을 거론하기도 했을 정도로 위협적인 군사 활동이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